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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 BUSINESS 2012.04] [아! 나의 아버지] '좋은친구' 소중함을 일깨워주시다

probee 2016-07-07 조회수 3,508
아버지는 "평생 동안 좋은 친구 한 명만 얻어도 인생에서 성공한 것"이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친구들과 놀기 좋아하는 자식이 걱정돼 사람을 가려 사귀라는 정도로만 알았다. 평생 동안 사귄 친구는 얼마나 될까. 언뜻 헤아려도 족히 몇 백 명은 되는데, 어떻게 좋은 친구 한 사람을 얻는 일이 그렇게 어렵다는 것일까. 아버지 생각이겠지. 일제강점기를 살아오신 아버지는 서울에서 화장품 제조업을 하셨다. 종손이신 아버지는 종갓집을 지켜야 한다는 할아버지 권유에 따라 잘되던 사업을 접고 광복 후 고향에 내려와 국가고시에 합격한 후 서울약방을 개업하셨다. 1979년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40여 년간 경북 의성군 안계면에서 약방을 운영하셨다. 우리 집은 마을에서 다소 넉넉한 지주였다. 그런 넉넉한 집에 잘난 정치인 사위를 맞으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기 시작한 것이다. 매형은 자유당·공화당 시절을 거치면서 8번의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고 2번 당선한 골수 야당 후보였다. 그 당시 야당 생활은 독립운동과 다를 바 없을 정도였다. 나의 사춘기는 질곡(桎梏)의 유신 시대에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이미 가세가 기울 대로 기운 우리 집은 외동아들의 등록금 하나 제대로 내 주지 못할 정도로 몰락돼 갔다. 한번은 등록금에 하숙비까지 몇 달 밀려 할 수 없이 집에 갔는데 어느 노인이 아버지에게 구걸하다시피 돈을 얻어 황급히 나가는 것이었다. 사연인즉, 큰 매형 선거 참모의 부친인데 아들이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돼 마지막으로 개소주를 먹고 싶어 한다며 돈을 얻으러 온 것이다. 거절 못하는 아버지는 아들이 학비를 받으러 온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날 매상을 톡톡 털어 그 노인의 빈손에 채워 보낸 것이다. 자식에게는 늘 엄격하고 남에게는 항상 베푸시기만 하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격동기를 지나면서 집안은 다시 옛 정서를 되찾기 시작했고 가세도 안정됐다. 여유가 생긴 아버지는 지난날과 달리 동네 친구들과 종종 어울려 지내시곤 했다. 아버지에게는 죽마고우인 아저씨 한 분이 계시는데 그분은 아버지 만나는 일 이외는 농사일밖에 모르는 성격이 외곬인 분이다. 난 한창 사춘기인 고등학생 때 어머니를 잃었다. 그 충격으로 방황할 때 충고를 아끼지 않았던 분이 박씨 아저씨였다. 그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망연자실 넋을 놓고 있는 나를 대신해 장례 절차까지 맡아주셨다. 아버지와 즐겁게 어울리던 아버지 친구 분들은 그 이후 한 번도 볼 수 없었지만 박씨 아저씨는 이웃에 있는 생가에 자주 들러 혼자 객지 생활은 어떻게 잘하고 있는지 늘 걱정 섞인 안부를 물어보셨다. 그 한결같은 마음은 평소에 두 분만이 간직한 우정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천명(知天命)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을 사귀어 왔고 지금도 교류하고 있다. 20년간 변화무쌍한 사업 세계에서 좋은 인연을 만나 풍요로워지기도 했고 때론 악연을 만나 오랫동안 고통받기도 했지만 그 안에는 어김없이 아버지가 계셨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柔能勝剛)'라는 인간관계의 가르침을 주시고 그 선한 삶을 살고가신 아버지, 당신을 닮아 행복합니다. 한경비즈니스 제852호(2012.04.04 발행)에 게재된 이승완 대표의 수필을 전문 게재합니다. 이승완 대표는 수필가로서도 활동하면서 언론에 기고를 통해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IP Address : 115.90.123.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