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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센터

프로폴리스로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故오유진 고문 추모 수필 (대전문학 95호 가을호)

Probee 2021-10-13 조회수 446

 

멘토와 마지막 이별

 

이 승 완

 

나는 대전대학교 총장이 주관하는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 하고 있다.
몇 년간 참석해 오던 위원회인데 오늘 유독 위원회 참석은 신임으로 취임한 Y 총장과 만남 때문에 긴장 되었다.
Y 총장은 멘토와 충북대학교 약대에서 함께 근무했던 절친한 사이다. 멘토는 6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요양병원에서 나아지지 않는 병마와 싸우는 야윈 모습에 안타까운 마음만 안고 돌아왔던 것이 그게 마지막이 될 줄은 알지 못했다. 병원을 다시 찾았지만 이미 병원을 옮기고 난 뒤라 소식은 알 수가 없었다. 가족에게도 연락하였지만 옮긴 병원을 알려주지 않았다. 당신과 맺은 인연들을 스스로 묶어 두지 않게 흔적을 지워버리려고 하는 마음인 것 같았다. 그 뒤 애써 더는 알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혹시 그간 멘토 소식을 Y 총장은 알고 있을 것 같았다.

 

Y 총장은 나를 반갑게 맞이하면서 첫 마디에 “ O 교수님이 작년 연말에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지인들이나 제자들도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예상은 하지만 사랑했던 사람들과 마지막 배웅도 받지 못한 고별 소식은 회한과 그리움이 밀려왔다. 이북에서 의과대학 재학 중 6.25 사변을 맞이한 멘토는 혈혈단신 자유를 찾아 월남하였듯이 그렇게 사모님 곁으로 홀연히 떠나신 것이다.

 

1987년 내가 N알로에 영업본부장으로 알로에 붐을 일으키고 있을 때 청주 대리점을 하는 점포장으로부터 충북대학교에서 알로에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약대 교수분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달려갔다. 교내 보건진료소장을 겸임하고 계실 때라 환자들 진료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만났다. 인자한 모습에 O 교수는 해가 질 때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알로에로 임상하신 연구를 자상하게 설명 해주었다. 그렇게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 뒤 대학교에 정년 후 회사 고문으로 모시고 함께 손을 잡고 전국을 누비면서 대중강연으로 알로에 산업에 중흥을 일으킨 유명한 알로에 전도사가 되었다.

 

지금은 매스컴과 SNS로 건강정보가 범람하지만, 당시에는 건강정보 특히 건강식품에 대한 전문가의 대중강연이 전무 하던 시절이기 때문에 O 교수의 열정적인 강연은 판매 사원들에게는 큰 자부심과 함께 소비자들에게도 큰 인기를 끌었다. 창업 멤버로 회사를 성공시킨 나는 화려하고 편한 길을 안주하기보다는 실패하더라도 내 갈 길을 가야겠다는 고심을 할 때 크게 용기를 준 분이 멘토였고 창업에도 동참해주었다. 건강기능식품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보자는 취지로 부설 건강기능식품연구원을 만들어 멘토는 원장을 맡아 주었다.

 

연구원에서는 소비자들 대상으로 무료 건강강좌를 100여 회 개최하였고 지금 프로폴리스 사업을 잉태하기 시작하였다. 나의 아버지는 자신의 삶을 통해서 내 인생에 거울이었다면 멘토는 배려, 겸손함, 부드러움, 열정, 지식공유의 깨달음을 주었고 냉정한 충고로 꿈을 디자인해 주신 분이다. 내가 배우려고 노력한다면 신은 스승을 내려보내 준다는데 나에게는 스승보다 더 소중한 멘토를 보내주었다.

아무도 가지 않았던 알로에 길과 두 번째 프로폴리스 길. 한 번은 길을 만들었고 한 번은 고난의 길이 되어 아직도 가야 할 길로 남아 있고 가지 않을 수 없는 길이 되어 버린 것이 프로폴리스의 길이다. 쉽지 않은 사업의 고난 시간이 너무 길어 많은 사람이 철새처럼 내 곁을 떠나갔다. 곁에서 지켜보면서 누구보다 힘들어했던 멘토도 다른 일에 잠시 눈을 돌렸다. 이 일로 인해 한 번도 섭섭한 마음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다만 나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 생각하면서 더 분발할 기회로 삼았다. 그리고 험난했던 그 길을 긴 세월 동안 미친 듯이 살아왔다.

 

어찌 보면 내 아버지와 함께 보낸 시간보다 더 긴 30여 년 세월을 멘토와 함께 희망을 바라보면서 고된 시간을 보냈다. 그토록 열망했던 사업도 이제 어려운 고비를 넘어가고 있을 즈음 갑자기 사모님이 별세했고 그 뒤부터 멘토의 건강이 눈에 띌 정도로 쇠약해져 갔다. 더 늦기 전에 2012년 창립 20주년 행사를 겸해서 창업 초기 동고동락했던 퇴직한 임직원, 대리점장, 판매사원들까지 초대하여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이별에 준비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치렀다.

그 후, 몇 달 뒤 멘토는 내가 옆에서 부축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한 상태인데도 대전 회사로 찾아왔다. 점심식사를 하고 걸어가면서 늙은이가 주책이 없어서 어려울 때 힘껏 도와주지는 못하고 어리석은 짓으로 힘들게 한 것 같아서.... 이 사장한테 미안해요.’ 내가 잊고 있었던 20여 년 전 그때 그 일을 사과하려고 힘든 걸음을 하신 것이다. 어쩌면 용서를 청해야 할 일이 몇 배나 더 많을지 모르는데.. 나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청하는 일을 애써 외면하면서 살아 왔던 나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고 부끄럽게 느껴졌다.

 

지난 30여 년 치열했던 사업 현장에서도 헤아릴 수 없이 상처를 주고 분명 용서와 사과해야 할 잘못들이 사과받을 일보다 훨씬 더 많게 살아온 나에게 멘토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당신 죽음이 어떤 무게를 갖게 하는지 큰 울림을 남겼다. 그제야 나는 지금까지 그릇되게 살았다는 것을 이순이 되어서야 비로소 깨달았다.용서하는 일보다. 용서를 청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뜻을 이제야 알 것 같다.

 

이 담화는 사과는 용서받을 때까지라는 시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고 싶다면 자기 멋대로 사과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사과를 받을 준비가 될 때까지 늦가을 사과나무처럼 서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꽃을 버린 기억으로 스스로 붉어지는 사과

사과는 사과를 갖고 하는 것도 아니다.

입이나 손바닥으로 하는 것도 아니다.

사과하고 싶다면

깊숙이 들어 있는 멍을 풀어 주고 싶다면

용서받을 때까지

늦가을 사과나무처럼 서 있어야 한다.